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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교실이 다시 고치는 교실이 된다

by knowledgeof 2026. 2. 12.

밤 8시, 동네 단톡방에 이런 글이 올라온다.
“전자레인지 버튼이 고장 난 거 같아요… 새로 사야 하나요?”
누군가는 “당근에 팔고 새로 사”라고 하고, 누군가는 “AS 부르면 7만 원”이라고 한다. 결국 대부분은 버린다. 고치기 귀찮아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수리비가 애매해서. 그 순간 한 대의 전자레인지가 쓰레기가 되고 또 한 번의 소비가 시작된다.

그런데 만약 동네에 고쳐 쓰는 문화가 기본값인 장소가 있다면?
폐교의 교실들이 수리 부스가 되고, 과학실이 전자 작업대가 되고, 목공실이 가구 수리 공방이 되고, 운동장이 중고·부품 교환 장터가 된다면?
이 기획의 이름은 간단하다. 소규모 제작·수리 공방촌(Repair Café + 메이커 수리학교). 돈을 벌기 위한 장사가 아니라 지역의 자원과 기술이 순환하는 생활 인프라다.

아래는 같은 이야기를 기획서처럼 딱딱하게 쓰지 않고 현장 운영 방식이 눈에 그려지도록 구성한 설계도다.

공방으로 운영되는 폐교

0. 이 공간의 규칙

  1. 우리는 새 제품을 파는 곳이 아니라 고쳐 쓰는 곳이다.
  2. “고쳐드립니다”보다 “함께 고칩니다”가 기본이다.
  3. 수리가 불가능하면 부품을 살리고 재료를 분해한다.
  4. 안전은 타협하지 않는다. 배터리·가스·고전압은 별도 기준.
  5. 결과가 남아야 한다. 수리 전/후 기록을 남긴다.

이 다섯 줄이 이 사업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없어도 운영은 되지만 있으면 문화가 생긴다.

1. 폐교를 ‘수리 마을’로 바꾸는 지도

폐교는 원래 기능별 공간이 나뉘어 있다. 수리촌도 그 구조를 그대로 쓰면 된다. 핵심은 전문성이 아니라 동선이다. 물건이 들어와서 → 진단되고 → 고쳐지거나 → 분해되어 → 나가야 한다.

A구역: 접수·진단 교실

  • 접수대(간단 신청서: 증상/모델/구매연도/위험요소 체크)
  • 10분 진단 테이블(전원, 소음, 열, 누전 의심 등)
  • “오늘 고칠 수 있는지” 1차 판정

여기서 중요한 건 실력보다 분류 능력이다. 접수 교실이 잘 돌아가면 전체 운영이 편해진다.

B구역: 전자·가전 Repair Café 교실

  • 작업대(ESD 매트, 인두기, 테스터기, 열풍기 등)
  • 흔한 고장 위주: 접촉불량, 케이블 단선, 스위치 불량, 납땜 크랙
  • “수리 메뉴판”을 벽에 붙인다:
    1. 케이블/단자 교체
    2. 스위치/버튼 수리
    3. 팬/모터 소음 점검
    4. 전원 불량 1차 진단(위험 작업은 외부 연계)

여기는 카페처럼 운영하면 참여가 늘어난다. 진짜 커피를 팔라는 뜻이 아니라 머무르기 편한 분위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C구역: 목공·가구 수리 교실

의자·서랍·식탁·문짝·몰딩 등 생활가구 수리

  • 본드/클램프/사포/도장 보수
  • ‘가구 응급처치’가 핵심: 완벽 제작보다 삶에서 당장 쓰게 만들기

이 구역은 만족도가 폭발한다. 고친 결과가 눈에 보이고, 집에서 바로 체감된다.

D구역: 금속·자전거·소형 장비 교실

  • 자전거 브레이크/변속 조정, 바퀴 트루잉 기초
  • 손잡이, 경첩, 프레임 연결부, 볼트 체결
  • 전동 킥보드 같은 건 안전 이슈가 있으니 가벼운 점검만 또는 외부 연계

생활 속 수리의 절반은 사실 ‘정비’다. 여기서 지역 남성·청소년 참여가 확 늘어난다.

E구역: 분해·부품은행 교실

  • 수리 불가 판정품을 분해해 부품 분류
  • 나사, 스프링, 스위치, 모터, 힌지, 플라스틱 케이스
  • “부품 포인트” 시스템(부품 기증하면 포인트, 부품 가져가면 차감)

이 방 하나가 자원순환의 심장이다. 그리고 운영비를 갉아먹는 “소모품 비용”을 크게 줄인다.

F구역: 안전·교육 교실

  • 월 2회: 초급 납땜/테스터기 사용법
  • 월 1회: 가구 수리·도장 기초
  • 분기 1회: 배터리 안전, 화재 예방, 감전 예방

폐교는 ‘학교’였으니 다시 학교처럼 쓰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

2. 운영을 ‘장터’가 아니라 ‘시스템’으로 만드는 4가지 메뉴

수리촌이 망하는 흔한 이유는 좋은 뜻만 있고 운영 단위가 없어서다. 메뉴를 4개로 고정하면 안정된다.

메뉴 1) 수리데이(주말 1회, 예약제)

  • 오전: 접수/진단 위주
  • 오후: 수리/부품 교체 집중
  • 마감: 결과 기록 + 다음 주 과제 안내

메뉴 2) 클래스(평일 저녁 1~2회)

  • 참여비는 낮게, 대신 재료비는 투명하게
  • 결과물: “내가 고친 물건 1개”가 졸업장

메뉴 3) 동네 출장 ‘가벼운 정비’(선택)

  • 고령가구 대상: 문손잡이, 서랍 레일, 의자 흔들림 같은 생활 정비
  • 이건 돈보다 지역 신뢰를 만든다.

메뉴 4) 부품장터(월 1회)

  • 운동장 또는 강당에서
  • 중고 부품, 공구, 고장난 기기(수리용) 교환
  • “버리기 전 마지막 기회” 행사

이 4개만 돌아가도 공간은 살아있다.

3. 자원순환 관점에서 ‘진짜’ 중요한 숫자 3개

이 공간의 성과를 “몇 명 왔냐”로만 보면 재미로 끝난다. 자원순환 거점이면 숫자가 달라야 한다.

  1. 연장된 수명(개월 수): 고친 물건이 평균 몇 개월 더 쓰였는가
  2. 회수된 부품 수: 분해로 살린 부품이 몇 개인가
  3. 폐기 회피 무게(kg): 버려질 뻔한 물건이 얼마나 줄었는가

이 세 가지가 쌓이면 이 공방촌은 ‘취미 공간’이 아니라 정책/교육/환경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인프라가 될 수 있다.

4. “수리”가 어려운 이유를, 이 공간이 대신 해결한다

사람들이 수리를 안 하는 이유는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 어디에 맡겨야 할지 모른다
  • 비용이 애매하다
  • 부품을 구할 길이 없다
  • 정보가 없다(모델명, 고장 원인)
  • 고치다가 더 망가질까 무섭다

수리촌은 이 다섯 가지를 구조로 해결한다.
진단 테이블이 불안을 줄이고, 부품은행이 비용을 줄이고, 클래스가 정보 격차를 줄이고, 안전 룰이 사고를 줄인다. 이게 ‘공간’이 아니라 ‘시스템’인 이유다.

5. 안전이 곧 신뢰다(특히 전자·배터리)

수리촌이 한 번에 무너지는 건 실력 부족이 아니라 사고다. 그래서 처음부터 금지/제한 항목을 명확히 해야 한다.

  • 리튬배터리 팽창/손상: 즉시 격리, 전문 처리 연계
  • 고전압(전자레인지, 일부 전원부): 원칙적으로 제한
  • 가스/압력용기 관련: 제한
  • 전기안전 검사 필요 품목: 점검 후 외부 연계

대신 주민이 가장 많이 가져오는 '안전한 수리'부터 완벽히 잡으면 된다. 멀티탭 단선, 선풍기 소음, 리모컨 접촉불량, 스탠드 스위치, 의자 흔들림 같은 것들. 이게 쌓이면 '여긴 믿을 만하다'가 된다.

6. 공방촌이 ‘마을’이 되려면, 사람 역할이 나뉘어야 한다

운영팀을 거창하게 꾸릴 필요는 없지만 역할은 분명해야 한다.

  • 진단 매니저: 접수/분류/안전 판정
  • 전자 멘토: 납땜·테스터 중심
  • 목공 멘토: 가구·문짝·레일
  • 정비 멘토: 자전거·볼트·체결
  • 기록 담당: 전/후 사진, 고장 유형 데이터화
  • 부품은행 담당: 분해, 분류, 재고 관리

한 사람이 다 하면 번아웃이 온다. 역할을 나누면 지속된다.

7. 이 기획의 가장 큰 매력: ‘지역 기술’이 남는다

폐교 수리촌은 단순히 물건을 살리는 게 아니다. 사람을 살린다.
은퇴한 기술자, 손재주 좋은 주민, 공업계 학생, 취미 메이커들이 모이면 지역에 기술이 남는다. “고장 = 교체”가 아니라 “고장 = 학습”이 된다. 그리고 이 학습이 반복되면 동네는 점점 덜 버리고 덜 소비하게 된다. 지역 단위로 보면 이건 꽤 큰 변화다.

8. 다른 형식의 결론: ‘수리촌 하루 운영일지’로 마무리

토요일 10:00
접수대에 라디오, 전기포트, 의자, 선풍기가 줄을 선다.
진단 매니저가 말한다. “오늘은 라디오는 가능, 전기포트는 단자 확인, 의자는 목공으로.”

11:30
전자 교실에서 인두가 달아오른다.
리모컨 버튼이 살아나고, 단선된 케이블이 새 단자로 바뀐다.
고친 사람의 얼굴이 제일 먼저 밝아진다.

14:00
목공 교실에서 흔들리던 의자가 단단해진다.
클램프가 잡아주는 30분 동안 옆자리에서 다른 주민이 레일 수리법을 배운다.

16:30
오늘 고치지 못한 제품은 분해실로 간다.
나사는 통에, 모터는 선반에, 스위치는 작은 봉투에 들어간다.
죽은 물건은 쓰레기가 아니라 부품이 된다.

18:00
벽 게시판에 오늘의 기록이 붙는다.
“수리 성공 27건 / 부품 회수 41개 / 폐기 회피 38kg”
사람들은 집에 돌아가면서 말한다. “다음 달엔 토스터도 가져와야지.”

이게 폐교 수리 공방촌의 힘이다.
멋진 건물보다, 거창한 이벤트보다, 반복되는 생활의 변화가 쌓인다. 버려진 교실은 다시 ‘고치는 교실’이 되고 동네는 조금씩 덜 버리고 더 오래 쓴다. 그게 자원순환의 시작이고 폐교가 지역에 남길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미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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