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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정체성의 상실과 재구성: 학교가 사라지면 '마을 중심'은 어디로 가나

by knowledgeof 2026. 2. 20.

운동회 날이면 온 마을이 모였습니다. 졸업식 날이면 할머니도 교복을 입은 손주 사진을 찍으러 나왔습니다. 그 학교가 사라졌을 때,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일 이유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운동회 날의 모습

마을에서 학교란 무엇이었나

한국에서 마을과 학교의 관계는 단순한 교육 서비스 제공자와 수혜자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학교는 마을의 달력이었습니다. 입학식이 있는 3월이면 봄이 시작됐고, 운동회가 열리는 가을이면 온 마을이 들썩였으며, 졸업식이 끝나면 한 해가 마무리됐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학교의 리듬에 맞춰 살았습니다.

학교는 마을의 지도이기도 했습니다. "학교 앞 슈퍼"라는 표현이 있을 만큼, 학교는 마을의 중심 좌표였습니다. 길을 묻는 사람에게 "학교 옆으로 돌면 돼요"라고 알려주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낯선 사람도 학교를 기준으로 마을의 지리를 파악했습니다. 학교는 마을의 물리적 중심이었고 동시에 마음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1982년 이후 전국에서 폐교된 학교 수는 3,900개를 넘었고 지금도 매년 수십 개씩 문을 닫습니다. 학교가 사라질 때마다 마을의 중심이 하나씩 비워집니다. 이 글은 그 빈자리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마을은 그 상실을 어떻게 감당하고 재구성하는지를 살펴봅니다.

지역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학교가 담당하던 역할

지역 정체성이라는 개념은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매우 구체적인 경험에서 만들어집니다. "나는 어느 학교 출신이다"라는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이 어디서 자랐는지,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었는지를 단번에 드러냅니다. 학교는 지역 구성원들에게 공통의 기억, 공통의 공간, 공통의 시간을 제공함으로써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기관이었습니다.

학교가 수행하던 지역 정체성 형성 기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공통의 서사를 만드는 기능입니다. 같은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공통의 이야기를 갖습니다. 어느 선생님이 엄했는지, 어느 해 운동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학교 뒤 산에 올라가다 혼난 기억 같은 것들이 쌓여 집단의 이야기가 됩니다. 이 이야기들은 세대를 넘어 전달되면서 마을의 구전 역사가 됩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두 세대가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의 출발점이 생깁니다.

둘째는 공간적 귀속감을 만드는 기능입니다. 사람들은 특정 장소와 연결될 때 그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낍니다. 학교 운동장, 교문 앞 골목, 교실 창문으로 보이던 풍경은 구체적인 공간 기억으로 남아 "내가 여기 사람이다"라는 감각을 만들어냅니다. 타지로 떠난 사람이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할 때 학교 앞에 먼저 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셋째는 세대 간 연결을 만드는 기능입니다. 학교는 아이들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부모 세대와 조부모 세대의 기억도 담겨 있는 공간입니다. 운동회에서 아버지가 달리기를 하던 자리에서 아이가 달리기를 합니다. 졸업식에서 어머니가 받은 졸업장과 같은 모양의 졸업장을 아이가 받습니다. 이런 반복을 통해 세대 간 연속성이 형성되고 마을은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학교가 사라진다는 것은 이 세 가지 기능이 한꺼번에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학교가 사라진 마을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폐교는 공문서상의 결정이지만, 그 영향은 공문서가 닿지 않는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마을의 달력입니다. 입학식, 운동회, 졸업식이 없어지면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공식적인 계기가 사라집니다. 물론 추석과 설은 남지만, 이 명절들은 전국적·가족 단위 행사이지 마을 공동체의 행사가 아닙니다. 마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이유, 옆집 아이가 얼마나 컸는지 확인하고 오랜 이웃과 안부를 나누는 기회가 줄어듭니다.

그다음으로 사라지는 것은 마을의 중심 공간입니다. 학교 운동장은 단순한 아이들의 놀이터가 아니었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저녁 산책을 나오고, 마을 축제가 열리고, 선거철이면 개표 방송을 보러 모이던 곳이었습니다. 학교가 폐교되면 이 공간이 잠기거나 방치됩니다. 대체 공간이 마련되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흩어집니다. 함께 있을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라지는 것은 마을 구성원들을 이어주던 비공식적 연결망입니다. 같은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학부모들은 자연스럽게 만납니다. 학교 앞에서, 학예회 날에, 학부모 회의에서 서로 얼굴을 익히고 이웃이 됩니다. 학교가 사라지면 이 만남의 이유가 사라집니다. 특히 이주민 가정과 원주민 가정이 서로를 알아가는 가장 자연스러운 통로였던 학교가 없어지면, 두 집단 사이의 거리는 더 멀어집니다.

이런 현상들이 축적되면 마을은 점점 "주소지"로 전락합니다. 사람들이 밤에 잠을 자러 돌아오는 곳, 주민등록이 등재된 곳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공간이 됩니다. 공동체가 아니라 단순한 거주지로 마을의 성격이 바뀌는 것입니다.

마을 중심의 이동: 무엇이 학교를 대체하는가

학교가 사라진 자리를 무엇이 채우는지는 마을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전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몇 가지 패턴이 보입니다.

가장 흔한 대체제는 경로당입니다. 고령화된 농촌 마을에서 학교가 폐교되면 마을의 실질적 중심은 경로당으로 이동합니다. 노인들이 매일 모이고, 마을 소식이 오가고, 공동의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됩니다. 그러나 경로당은 특정 세대만의 공간입니다. 젊은 이주민 가족이나 중년 귀촌인들이 자연스럽게 편입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마을의 중심이 경로당으로 이동했다는 것은 사실상 "이 마을은 노인들의 마을"이 되었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습니다.

두 번째 대체제는 종교 시설입니다. 농어촌 마을에서 교회나 절은 오래전부터 지역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습니다. 학교가 사라진 이후 종교 시설이 더욱 강화된 공동체 기능을 담당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를 공유하는 구성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비신자나 다른 종교를 가진 주민들에게는 해당 공간이 오히려 소외감을 주는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대체제는 온라인 커뮤니티입니다. 특히 귀촌 이주민들이 많은 마을에서는 지역 카카오톡 오픈채팅이나 인터넷 카페가 마을 공동체의 소통 공간 역할을 합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도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마을 소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데 편리합니다. 그러나 온라인 커뮤니티는 물리적 공간이 주는 귀속감과 연대감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합니다. 화면 속에서 이웃을 만나는 것과 운동장에서 함께 땀 흘리는 것은 다른 경험입니다.

네 번째는 새로운 공공시설의 조성입니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폐교 부지에 주민 문화센터, 작은 도서관, 마을 카페 등을 조성해 마을 중심 공간의 기능을 이어가려 시도합니다. 성공적인 사례도 있지만, 대부분은 초기 반짝 관심 이후 이용객이 줄고 결국 또 다른 방치 공간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공간만 만들면 커뮤니티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많은 지자체가 뒤늦게 깨닫습니다.

정체성의 재구성: 실패한 사례와 성공한 사례

학교가 사라진 이후 지역 정체성을 어떻게 재구성하느냐의 문제는 마을의 생사를 가르는 핵심 질문입니다. 전국의 사례를 보면 실패와 성공이 뚜렷하게 갈립니다.

실패한 사례들의 공통점은 "공간만 바꾸고 사람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폐교 부지를 멋진 문화시설로 바꿔놓았지만, 정작 그 시설을 이용할 주민들이 이미 마을을 떠난 경우입니다. 외부 방문객을 위한 카페나 펜션으로 폐교 건물을 리모델링했지만, 이것이 지역 주민들의 일상과 연결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공간의 물리적 변신이 공동체의 정서적 재건을 자동으로 이끌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런 사례들이 증명합니다.

성공한 사례들은 다른 방향에서 접근했습니다. 전라남도 신안군의 일부 섬 마을들은 폐교 이후 마을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협동조합을 만들어 지역 특산물을 가공·판매하는 거점으로 폐교 공간을 활용했습니다. 단순히 공간을 활용한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함께 일하고 수익을 나누는 경제 공동체를 만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은 다시 정기적으로 만나고, 공동의 목표를 갖고,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했습니다.

강원도의 한 마을은 폐교 공간을 청년 귀촌인들을 위한 거주·창업 공간으로 전환하면서 성공적인 인구 유입을 이끌어냈습니다. 핵심은 새로 들어온 청년들이 마을 원주민 노인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의무적으로 운영하도록 설계한 것입니다. 노인의 농사 기술과 청년의 디지털 역량이 교환되고 서로 밥을 나눠 먹으면서 새로운 형태의 마을 공동체가 만들어졌습니다. 학교가 했던 세대 간 연결의 기능을 다른 방식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경상북도의 한 소도시에서는 폐교 운동장을 마을 장터로 활용하는 시도가 성공을 거뒀습니다. 매달 한 번 열리는 장터에 주민들이 직접 만든 물건을 가져 나오고 외부 방문객도 찾아오면서 자연스러운 만남의 장이 만들어졌습니다. 학교 운동회를 대신하는 마을 축제의 기능을 장터가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마을에서 장터 날은 새로운 달력의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이주민과 원주민: 정체성 재구성의 주체는 누구인가

지역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 정체성을 누가 만들 것이냐는 것입니다. 원주민들의 기억에 기반한 정체성인가, 새로 들어온 이주민들의 감각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정체성인가.

원주민들은 흔히 "원래의 마을다움"을 지키려 합니다. 학교가 있던 시절의 마을, 모두가 서로를 알던 시절의 마을이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폐교 부지가 낯선 용도로 바뀌거나 외지인들의 공간이 되는 것을 불편하게 느낍니다. 그것이 건물의 변화이더라도, 자신들의 기억이 덧씌워지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주민들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그들에게 폐교는 비어 있는 가능성입니다. 원주민들이 아쉬워하는 것들에 감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더 과감하고 실험적인 제안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감함이 때로는 원주민들에게 무례함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우리 삶의 흔적이 담긴 공간을 외지인들이 마음대로 바꾼다"는 감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지역 정체성 재구성은 이 두 관점이 충돌하지 않고 교차하는 지점에서 만들어집니다. 원주민의 기억과 이주민의 에너지가 결합할 때, 과거를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의도적인 설계와 지속적인 대화가 필요합니다. 마을 안에 그 대화를 이끌 수 있는 사람, 혹은 구조가 있어야 합니다.

'마을 중심'의 미래: 학교 없이도 공동체는 가능한가

학교 없이도 마을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가능하지만, 훨씬 더 많은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입니다.

학교가 있을 때,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유지됩니다. 별도의 노력 없이도 입학식, 운동회, 졸업식이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학교가 없어지면, 이 자연스러운 구심력이 사라집니다. 공동체를 유지하려면 의도적으로 모일 이유를 만들고, 함께할 공간을 설계하고, 연결을 이어갈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축제나 행사를 자주 열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왜 좋은가"를 주민들이 공유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답이 농사 때문이든, 자연환경 때문이든, 아이들 교육 때문이든, 사람들이 공통의 이유로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감각이 있어야 공동체가 지속됩니다.

학교가 사라진 후에도 살아남은 마을들은 대부분 이 공통의 이유를 새롭게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공동 농업이든, 공동 육아든, 지역 문화 보존이든, 어떤 형태이든 간에 주민들이 함께할 명분과 공간을 만들어냈습니다. 반면 무너진 마을들은 대부분 학교가 사라지고 나서 사람들이 각자도생의 방향으로 흩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지역 정체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학교라는 자동적인 공동체 형성 기제가 사라진 이후에는, 정체성은 구성원들이 능동적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더 어렵고,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공동체는 어쩌면 학교가 있던 시절보다 더 의식적이고 단단한 공동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위기가 공동체를 파괴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를 다시 발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며: 빈 운동장 앞에서

폐교된 학교 앞에 서면 이상한 감각이 듭니다. 건물은 그대로인데 소리가 없습니다. 아이들 웃음소리, 수업 종소리, 운동회 날의 함성이 사라진 자리에 정적만 남아 있습니다. 그 정적은 단순히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의 부재입니다.

마을 중심이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의 답은, 결국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학교가 없어도 사람들은 모일 수 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서로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단, 그것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의식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학교가 사라진 마을이 새로운 중심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 자체가 마을의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가 새로운 지역 정체성의 씨앗이 됩니다. 빈 운동장이 다시 사람들로 채워질 수 있는지는, 그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간절히 함께하고 싶은지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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