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닫은 학교에서 미래를 실험합니다. 빈 교실에서 스마트 농업 데이터를 수집하고, 운동장에서 자율주행 셔틀을 테스트하며, 체육관에서 지역 문제 해결 워크숍이 열립니다. 폐교가 리빙랩으로 진화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리빙랩이란 무엇인가: 개념부터 제대로 이해하기
리빙랩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념 자체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리빙랩은 실제 생활환경을 실험실로 삼아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혁신 방법론입니다. 기존의 연구소나 실험실이 통제된 환경에서 가설을 검증하는 방식이라면, 리빙랩은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일하는 공간에서 실험이 이루어집니다.
리빙랩의 핵심은 사용자 참여입니다. 기술 개발자나 연구자들이 일방적으로 솔루션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처음부터 문제 정의와 해결책 설계에 참여합니다. 이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는 실제 삶에서 곧바로 테스트되고 그 결과가 다시 개선에 반영됩니다. 현실과 실험이 동시에 진행되는 방식입니다.
리빙랩 개념은 2000년대 초반 미국 MIT 미디어랩의 윌리엄 미첼 교수가 처음 제안했습니다.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현재 유럽에만 400개 이상의 리빙랩이 운영 중입니다. 스마트시티, 헬스케어, 에너지, 교육,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리빙랩 방법론이 활용됩니다.
한국에서는 2010년대 중반부터 리빙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등 여러 부처가 리빙랩 기반 혁신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지자체 차원에서도 리빙랩을 통한 지역 문제 해결 시도가 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흐름에서 폐교가 새로운 주인공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폐교와 리빙랩: 왜 이 둘의 만남이 자연스러운가
폐교가 리빙랩의 거점으로 주목받는 데는 우연이 없습니다. 폐교가 가진 물리적·사회적 특성이 리빙랩의 조건과 놀랍도록 잘 맞아떨어집니다.
물리적 조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리빙랩은 다양한 실험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폐교는 여러 개의 독립된 교실, 넓은 운동장, 체육관, 급식실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 가능한 공간들이 한 부지 안에 모여 있습니다. 하나의 건물 안에서 데이터 수집, 프로토타입 테스트, 주민 참여 워크숍, 결과 전시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공간 구성은 새로 건물을 짓지 않고는 도시에서 확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지리적 위치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농어촌 폐교는 대부분 마을 안 혹은 마을 가까이에 위치합니다. 이것은 리빙랩이 실험 대상으로 삼는 실제 생활환경과 실험 공간이 가깝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마트 농업 실험을 한다면 농지 근처에, 고령자 돌봄 솔루션을 실험한다면 고령자들이 사는 마을 안에 리빙랩이 있어야 합니다. 폐교는 이 조건을 자연스럽게 충족합니다.
지역 주민과의 관계도 유리한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학교는 지역 주민 모두에게 친숙한 공간입니다. 낯선 연구 시설이나 기업이 들어오는 것보다 오랜 학교 건물에서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것이 주민들의 심리적 거부감을 낮춥니다. 리빙랩의 성패를 좌우하는 주민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을 폐교라는 공간이 자연스럽게 통과시켜 줍니다.
비용 측면에서도 폐교 리빙랩은 효율적입니다. 도시에서 리빙랩 공간을 새로 조성하려면 막대한 임대료나 건축비가 필요합니다. 반면 폐교는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으로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지자체나 교육청이 폐교 부지를 리빙랩 목적으로 제공하면, 연구 기관이나 기업은 실험 비용을 공간 임대가 아닌 실제 연구와 지역 기여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폐교 리빙랩의 실제 실험들: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
이론이 아닌 현실에서 폐교 리빙랩이 어떤 실험들을 진행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미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실험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마트 농업 실험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분야입니다. 농어촌 폐교의 교실들은 수직 농장, 스마트 온실, 농업 데이터 분석 센터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전라북도의 한 폐교에서는 IoT 센서를 활용한 토양 상태 모니터링, 기상 데이터 기반 작물 재배 최적화, 드론을 이용한 농지 관찰 실험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농민들이 직접 데이터 수집에 참여하고 수집된 데이터를 분석해 자신의 농지에 적용하는 과정을 함께 경험합니다. 폐교 운동장은 농업용 드론의 이착륙과 비행 테스트 공간으로 활용됩니다.
고령자 돌봄 기술 실험도 농어촌 폐교 리빙랩의 주요 실험 분야입니다. 초고령화된 농촌 마을에서 고령자들의 일상을 안전하게 지원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테스트합니다. 경상남도의 한 폐교에서는 낙상 감지 센서, 활동량 모니터링 웨어러블, 원격 건강 모니터링 시스템 등을 실제 마을 고령자들과 함께 실험하고 있습니다. 교실 하나는 데이터 수집과 분석 공간으로, 다른 교실은 고령자들이 기기 사용법을 배우고 경험을 나누는 공간으로 운영됩니다. 고령자들이 기술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기술 개선의 파트너로 참여합니다.
에너지 자립 실험도 폐교 리빙랩에서 활발히 이루어집니다. 넓은 지붕과 운동장을 가진 폐교는 태양광 발전 실험에 최적의 조건입니다. 충청남도의 한 폐교에서는 태양광 패널 설치와 에너지 저장 시스템, 마을 단위 에너지 공유 네트워크 실험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실험에서 생성된 전력 데이터는 마을의 에너지 사용 패턴 분석에 활용되고 최적의 에너지 배분 알고리즘 개발에 기여합니다. 실험에 참여하는 마을 주민들은 에너지 절감 효과를 실질적으로 체감하면서 실험의 지속적인 파트너가 됩니다.
이동권 해결 실험도 주목할 만합니다. 대중교통이 극히 제한된 농어촌 지역에서 이동권은 삶의 질을 좌우하는 핵심 문제입니다. 강원도의 한 폐교 리빙랩에서는 수요 응답형 교통 서비스, 소형 자율주행 셔틀 시범 운행, 공유 모빌리티 플랫폼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앱으로 이동 수요를 신청하면 최적 경로로 차량이 배차되는 시스템을 실제 환경에서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폐교 주차장은 자율주행 차량의 대기 공간이자 충전 시설로 활용됩니다.
디지털 역량 강화 실험도 빠질 수 없습니다. 디지털 기기와 서비스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농촌 고령 주민들을 위한 디지털 교육이 폐교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단순한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가르칠 때 고령자들이 가장 잘 배우는지를 데이터로 기록하고 분석하는 방법론적 실험이기도 합니다. 이 데이터는 전국의 디지털 소외 계층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활용됩니다.
데이터가 지역을 바꾸는 방법: 폐교 리빙랩의 데이터 생태계
리빙랩의 핵심 자산은 데이터입니다. 실제 생활 환경에서 수집된 데이터는 통제된 실험실에서 얻은 데이터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현실의 복잡성과 다양성이 반영된 데이터는 실제로 작동하는 솔루션을 만드는 데 필수적입니다.
폐교 리빙랩에서 수집되는 데이터의 종류는 매우 다양합니다. 농업 분야에서는 토양 온도와 습도, 작물 생육 데이터, 날씨와 수확량의 상관관계 데이터가 수집됩니다. 고령자 돌봄 분야에서는 활동량, 수면 패턴, 건강 지표 변화 데이터가 쌓입니다. 에너지 분야에서는 시간대별 전력 생산과 소비 데이터, 계절별 패턴 데이터가 기록됩니다. 이동권 분야에서는 주민들의 이동 패턴, 시간대별 교통 수요, 경로 효율성 데이터가 축적됩니다.
이 데이터들이 가치를 갖는 이유는 단순히 많이 모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특정 지역의 특정 주민들이 실제 생활 속에서 만들어낸 데이터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평균 연령 70세가 넘는 산간 마을 주민들의 이동 패턴 데이터는, 전국의 비슷한 조건을 가진 수백 개 마을에서 이동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직접 활용될 수 있습니다. 한 마을의 실험이 전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데이터 수집과 활용 과정에서 지역 주민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주민들이 단순한 데이터 제공자가 아니라, 데이터가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직접 확인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수집된 데이터를 주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시각화하고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과정에 주민들이 참여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데이터가 주민들의 것이라는 감각이 있어야 실험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데이터 보안과 프라이버시 문제도 반드시 다루어야 합니다. 고령자 건강 데이터, 이동 패턴 데이터 등은 민감한 개인정보를 포함합니다. 리빙랩 참여 주민들에게 데이터 수집의 목적과 활용 방식을 명확히 설명하고 개인 식별이 불가능한 형태로 데이터를 처리하는 것이 신뢰 구축의 기본입니다. 주민들이 언제든지 데이터 제공을 중단할 수 있는 권리도 보장되어야 합니다. 데이터 거버넌스가 리빙랩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입니다.
지역 혁신의 생태계: 폐교 리빙랩이 만드는 연결망
폐교 리빙랩의 진정한 가치는 단일 실험의 성과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내는 혁신 생태계에 있습니다. 하나의 폐교 리빙랩이 중심이 되어 지역 내 다양한 주체들이 연결되고 협력하는 네트워크가 형성될 때, 지역 혁신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대학과의 연계가 첫 번째 중요한 축입니다. 지방 대학들은 연구를 위한 실험 현장이 필요하고 지역 사회와의 연결을 통해 존재 의의를 강화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폐교 리빙랩은 지방 대학에게 이상적인 현장 연구 공간이 됩니다. 농업공학, 사회복지, 교통공학, 에너지공학 등 다양한 학과의 연구자들이 폐교 리빙랩과 협력하면, 대학의 연구 역량이 지역 문제 해결에 직접 연결됩니다. 학생들에게는 실제 현장에서 배우는 프로젝트 기반 학습 기회가 생깁니다.
스타트업과의 연계도 중요합니다. 농업 기술, 고령자 케어 기술, 에너지 기술 분야의 스타트업들은 실제 환경에서 제품을 테스트할 공간과 기회를 필요로 합니다. 폐교 리빙랩은 이들에게 실제 사용자와 함께 제품을 개선할 수 있는 실험실을 제공합니다. 대기업 연구소나 도시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테스트와는 달리, 농어촌의 특수한 조건에서 검증된 기술은 더 강한 경쟁력을 갖게 됩니다.
지자체와의 연계는 리빙랩의 성과가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만듭니다. 리빙랩에서 검증된 솔루션을 지자체가 지역 전체에 확산하는 정책을 수립하면, 실험의 영향력이 폐교 한 곳에서 지역 전체로 확대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리빙랩과 지자체 사이에 지속적인 소통 채널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지자체 담당자가 리빙랩 운영 위원회에 참여하거나, 정기적인 성과 공유 세션을 갖는 방식이 효과적입니다.
주민 커뮤니티와의 연계는 리빙랩의 뿌리입니다. 실험의 주체이자 수혜자인 주민들이 리빙랩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구조가 없으면 리빙랩은 외부인들의 연구 기지로 전락합니다. 마을 주민이 리빙랩 운영 위원으로 참여하고, 실험 결과가 마을 공동체 논의의 재료가 되며, 리빙랩의 성과가 마을 전체에 돌아오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해외 선진 사례: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폐교·리빙랩 모델
폐교나 유휴 공공시설을 리빙랩으로 전환하는 시도는 세계 각국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공적인 해외 사례들을 살펴보면 한국의 폐교 리빙랩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핀란드의 포리 리빙랩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농촌 지역 혁신 모델입니다. 인구 감소와 경제 침체를 겪던 핀란드 서부 해안 지역에서 시작된 이 리빙랩은 폐쇄된 공공건물들을 거점으로 스마트 어업, 바이오에너지, 디지털 헬스케어 실험을 동시에 진행했습니다. 핵심 성공 요인은 지역 주민들이 프로그램 설계 단계부터 참여해 자신들이 실제로 겪는 문제를 실험 주제로 제안했다는 것입니다. 외부 연구자들이 문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문제를 규정하고 연구자들이 해결을 지원하는 구조였습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수퍼블록 리빙랩은 도시 리빙랩의 사례이지만, 유휴 공간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참고할 만합니다. 차량 통행이 줄어든 블록 내 공간을 주민 실험실로 전환해 도시 농업, 공동 육아, 에너지 공유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이 실험들의 데이터가 도시 정책 결정에 직접 활용되면서, 리빙랩과 정책 사이의 피드백 루프가 만들어졌습니다.
일본의 지방 창생 리빙랩 사례도 주목할 만합니다. 일본은 한국보다 먼저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 문제를 경험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폐교와 빈집을 활용한 리빙랩 방식의 지역 재생 프로젝트를 다수 진행했습니다. 특히 도쿠시마현의 카미야마 프로젝트는 위성 인터넷 환경을 구축한 폐교를 중심으로 IT 기업과 원격 근무자들을 유치하면서 인구 유출을 막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한 사례로 유명합니다. 이 사례는 디지털 인프라가 갖춰진 폐교 리빙랩이 새로운 인구 유입의 기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네덜란드의 와게닝겐 농업 리빙랩은 세계 최고 수준의 농업 연구를 실제 농촌 현장과 연결하는 모델입니다. 농업 연구 기관과 지역 농민들이 공동으로 실험을 설계하고, 수집된 데이터를 공유하며, 연구 결과가 곧바로 농업 현장에 적용됩니다. 이 모델에서 흥미로운 점은 농민들이 단순한 실험 대상이 아니라 지식 생산자로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농민들의 경험적 지식이 연구자들의 과학적 지식과 대등하게 다루어집니다.
폐교 리빙랩을 방해하는 장벽들: 솔직한 진단
폐교 리빙랩의 가능성이 크다고 해서 실현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현실에서 작동하려면 여러 장벽을 넘어야 합니다.
행정적 장벽이 첫 번째입니다. 폐교 부지의 용도 변경, 리빙랩 목적의 대부 승인, 다양한 실험 활동에 필요한 인허가 등 행정 절차가 복잡합니다. 교육청, 지자체, 관련 부처가 각각 다른 기준으로 허가를 내주기 때문에, 하나의 리빙랩을 시작하기 위해 수십 개의 행정 창구를 거쳐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어 애초의 혁신 의지가 꺾이는 경우가 생깁니다.
주민 신뢰 구축의 어려움도 현실적인 장벽입니다. 외부에서 온 연구자나 기업이 마을에 들어와 실험을 하겠다고 하면,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경계심을 갖습니다. "우리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 것 아닌가", "데이터를 수집해서 뭐에 쓸 것인가", "실험이 끝나면 떠날 것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이 신뢰를 구축하는 데는 단기간의 설명회 몇 번으로는 부족하고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친 지속적인 관계 형성이 필요합니다.
전문 인력 부족도 큰 과제입니다. 리빙랩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기술적 역량, 데이터 분석 역량, 커뮤니티 운영 역량, 행정 역량을 두루 갖춘 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복합적인 역량을 가진 인력은 도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농어촌 폐교 리빙랩으로 이런 인력을 유치하고 유지하려면 도시와 경쟁할 수 있는 처우와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지속적인 재원 확보도 항상적인 과제입니다. 초기에는 정부 지원금이나 기업 투자로 시작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안정적인 수익 구조 없이는 운영이 어려워집니다. 리빙랩에서 나온 성과물의 지식재산권은 누구에게 귀속되는지, 기업이 리빙랩에서 검증한 제품으로 수익을 올릴 때 지역 커뮤니티에는 어떤 방식으로 환원되는지를 처음부터 명확하게 설계해야 합니다. 이 설계가 없으면 지역 커뮤니티가 착취당했다는 인식이 생기고 신뢰가 무너집니다.
실험 결과의 실제 정책 반영 여부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리빙랩에서 아무리 좋은 솔루션이 나와도, 이것이 지자체의 정책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실험은 일회성 프로젝트로 끝납니다. 리빙랩과 정책 결정 사이의 연결 고리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제도적 설계가 필요합니다.
폐교 리빙랩을 위한 정책 제언: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가
폐교 리빙랩이 지역 혁신의 실질적인 거점이 되려면 제도적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첫째, 폐교 리빙랩 전용 법적 지위를 만들어야 합니다. 현행 폐교재산 특별법에 리빙랩 목적의 활용을 명시하고 이 경우 대부 기간 연장, 용도 변경 절차 간소화, 실험 활동에 대한 규제 샌드박스 적용 등의 특례를 부여해야 합니다. 법적 지위가 명확해지면 민간의 투자와 참여도 활발해집니다.
둘째, 부처 간 협업 체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폐교 리빙랩은 교육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농림축산식품부,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등 여러 부처의 정책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습니다. 현재는 각 부처가 개별적으로 관련 사업을 진행하면서 칸막이가 생기고 현장에서는 중복 행정의 비효율을 겪습니다. 폐교 리빙랩을 위한 부처 간 통합 지원 체계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셋째, 지역 주도 리빙랩 설계 지원이 필요합니다. 중앙에서 리빙랩 모델을 만들어 지역에 보급하는 하향식 방식이 아니라, 각 지역의 문제와 자원을 기반으로 리빙랩을 설계하는 것을 지원하는 상향식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리빙랩 컨설팅 지원, 설계 전문가 파견, 우수 사례 공유 플랫폼 구축 등이 이를 위한 구체적인 지원 방안입니다.
넷째, 리빙랩 성과의 측정과 공유 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어떤 실험이 효과가 있었는지, 어떤 데이터가 수집되었는지, 어떤 정책 변화로 이어졌는지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공유하는 플랫폼이 필요합니다. 한 지역의 실험 성과가 다른 지역의 문제 해결에 활용될 수 있도록 지식 공유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전국적인 혁신 확산의 기반이 됩니다.
폐교 리빙랩이 그리는 지역의 미래
폐교 리빙랩이 제대로 작동하는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요. 가까운 미래에 실현 가능한 그림을 그려봅니다.
아침이면 마을 농부들이 폐교 리빙랩의 데이터 대시보드에 접속해 자신의 농지 상태를 확인합니다. 어제 수집된 토양 데이터와 기상 예측을 바탕으로 오늘 물을 줄지, 비료를 뿌릴지를 결정합니다. 이 결정의 근거는 같은 마을의 100개 농지에서 쌓인 3년치 데이터입니다.
낮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폐교 교실에서 건강 모니터링 프로그램에 참여합니다. 혈압과 활동량을 측정하고 화상으로 의사와 상담합니다. 이 데이터들은 익명화되어 전국 농촌 고령자 건강 관리 모델 개발에 활용됩니다.
오후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스타트업 개발자들이 지역 주민들과 함께 앉아 새로운 수요 응답형 교통 앱의 시제품을 테스트합니다. 주민들이 직접 앱을 써보고 불편한 점을 이야기하면, 개발자들이 그 자리에서 개선안을 논의합니다.
저녁에는 폐교 체육관에서 마을 회의가 열립니다. 이번 달 리빙랩 실험 결과를 주민들과 공유하고 다음 달 실험 주제를 함께 결정합니다. 마을 어르신들의 경험과 외부 연구자들의 분석이 한자리에서 만납니다.
이것이 폐교 리빙랩이 만들 수 있는 마을의 하루입니다. 학교가 사라진 자리에서 마을의 미래를 실험하는 곳. 데이터가 흐르고 사람이 연결되는 곳. 지역 문제를 지역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해결하는 곳. 폐교가 리빙랩이 되는 시대는, 사실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마치며: 실험하는 마을이 살아남는다
지역 소멸의 시대에 살아남는 마을과 사라지는 마을을 가르는 기준 중 하나는 혁신 역량입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실패를 통해 배우고, 외부와 연결하며 성장하는 역량 말입니다. 폐교 리빙랩은 이 역량을 마을에 심어주는 장치입니다.
물론 모든 폐교가 리빙랩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리빙랩이 지역 소멸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마법도 아닙니다. 그러나 실험하는 마을은 적어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빈 교실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운동장에서 새로운 기술을 테스트하고, 체육관에서 주민들이 머리를 맞대는 마을은 아직 포기하지 않은 마을입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자리에서 다른 종류의 활기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데이터의 흐름이든, 실험의 소음이든, 문제를 풀어나가는 사람들의 토론 소리든. 폐교가 리빙랩이 되는 순간, 마을은 과거를 추억하는 곳이 아니라 미래를 만드는 곳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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